감정은 표현되지 않을 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몸속 어딘가에 남는다. 억제된 감정은 근육 긴장, 자율신경계 불균형, 면역력 저하를 유발하며, 만성 통증이나 위장 장애, 심혈관 질환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부정적 감정을 억누르는 습관은 장기적으로 우울, 불면, 피로와 같은 정서적 소진은 물론, 내과적 질환까지 유발할 수 있다. 이 글은 ‘참는 습관’이 왜 몸을 아프게 하는지를 과학적이고 심리생리학적으로 설명한다.
억누른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감정을 느낀다. 기쁨, 분노, 서운함, 두려움, 안도감 같은 다양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가며 삶을 구성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감정들을 모두 ‘표현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사회적 역할, 직장 내 위계, 가족 관계, 혹은 ‘괜찮은 사람’이라는 이미지에 갇혀 많은 이들이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간다. 그때마다 우리는 참는다. 말 대신 미소를, 분노 대신 침묵을, 불안을 ‘괜찮아’라는 말로 덮는다. 하지만 감정은 ‘없던 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표현되지 않은 감정은 고스란히 몸 어딘가에 저장된다. 억제된 감정은 자율신경계를 긴장 상태로 만들고, 교감신경계가 만성적으로 활성화되며 스트레스성 호르몬의 분비가 늘어난다. 이는 위장 기능 저하, 심박수 상승, 근육 긴장, 수면의 질 저하로 이어진다. 특히 감정을 억제하는 습관은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조차 모르게 만들고, 감각의 민감도를 떨어뜨린다. 이로 인해 몸은 일종의 ‘방어적 무감각’ 상태로 들어가고, 회복을 위한 에너지조차 줄어든다. 단기적으로는 ‘버텼다’고 느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감정을 받아들이고 흘려보내지 못한 대가가 피로, 통증, 우울, 불면 등으로 돌아오게 된다. 감정 억제가 단순한 성격 문제가 아닌 이유는, 그것이 몸 전체의 기능에 영향을 미치는 생리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그리고 깊게,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간다. 그리고 분명한 점이 있다면, 그 억누름은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우리 몸을 갉아먹는다는 사실일 지도 모른다.
감정 억제: 자신을 망가뜨리는 생리적·심리적 연쇄반응
감정 억제는 우리의 뇌와 신체에 동시에 영향을 미치는 전신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뇌에서는 편도체가 자극을 감지하지만, 전두엽이 이를 의식적으로 ‘참으라’는 명령을 내릴 때 발생하는 긴장감은 신체의 모든 기능에 즉각적인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화가 났음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억누를 경우, 교감신경계는 여전히 흥분 상태에 머무르며 심박수가 올라가고, 혈압이 상승한다. 위장 기능은 느려지고, 근육은 수축된 채 유지된다. 이러한 반응이 반복되면 장기적으로 고혈압, 소화불량, 만성 근육통 같은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또한 감정을 억누르는 사람일수록 면역세포의 활성도는 낮아지고, 염증 반응을 조절하는 능력도 떨어진다. 감정의 억제는 감각 신경계의 민감도에도 영향을 준다. 슬픔이나 분노를 억제한 상태에서는 통증을 더 강하게 느끼거나, 반대로 통증을 인지하지 못한 채 무리하게 움직이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이로 인해 만성질환이 늦게 발견되거나, 작은 신체 신호들을 놓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감정 억제는 심리적으로도 우울, 무기력, 자기혐오를 강화시킨다. 감정은 표현되지 않을 때 ‘내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을 강화하며, 이는 자존감 저하로 이어진다. 나아가 감정을 계속 억누르다 보면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게 된다. 감정 억제는 자기 소외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이며, 이 과정은 감정의 문제를 넘어 정체성의 혼란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결국 감정 억제는 ‘남을 위해 나를 포기하는’ 습관에서 비롯되지만, 그 결과는 남이 아닌 내 몸과 마음이 고스란히 짊어지게 된다.
감정을 회복할 때 비로소 신체도 살아난다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은 단지 ‘말로 풀어낸다’는 의미를 넘어서, 나 자신을 존중하는 행위다. 우리는 종종 ‘말하면 약해 보인다’, ‘참는 게 미덕이다’라는 인식에 묶여 자연스러운 우리의 내부 감정을 억누르지만, 실제로 가장 강한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정확한 시점에 건강하게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다. 중요한 점은 억눌린 감정은 언젠가 다른 방식으로 분출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몸이다. 이유 없이 피곤하거나, 명확한 진단 없이 계속되는 통증, 잠이 들지 않는 밤, 혹은 반복되는 소화불량은 모두 감정의 억제에서 비롯된 신호일 수 있다. 따라서 건강을 회복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나 스스로의 감정 언어를 되찾는 것이다. ‘나는 지금 어떤 기분인가’, ‘이 감정은 어디서 왔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그것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훈련이 필요하다. 억눌림 없는 감정은 반드시 폭발적일 필요는 없다. 조용하고 일상적인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일기, 대화, 그림, 음악, 혹은 단순한 숨 고르기만으로도 감정은 흐르고, 흐르는 감정은 몸의 긴장을 완화시킨다. 우리는 누구도 완벽하지 않으며, 감정 또한 완벽할 수 없다. 그러나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우리들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그 감정을 성심껏 돌본다는 것은 자신을 살리는 일이기도 하다. 더 이상 ‘참는 몸’이 아니라 ‘표현하는 몸’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신체의 회복에 다가갈 수 있다. 신체의 회복은 마음의 회복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마음은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차근차근 꺼내는 순간부터 회복되기 시작한다.